#1.
초등학교 5학년때의 일이다.지역 MBC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퀴즈쇼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학교 순서가 돌아와서, 학교 대표를 뽑기 위해 반별 대표를 뽑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에서는 성필이와 성희가 제일 공부를 잘하니 그 둘로 하자."고 했지만
반 친구들은 '불공평해요~ 학급 퀴즈대회해서 대표를 뽑아요~'라고 졸라댔고,
선생님은 못내 결국 즉석으로 20문제짜리 상식 쪽지 시험을 출제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는 의지로
모두들 평소 시험볼 때보다 열심히 문제를 풀었고,
결과는,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점수가 높았다.
사실, 나는 반에서 10등 밖을 맴도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아이들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결과대로 내가 대표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선생님은 곧바로 조금 무서운 얼굴을 하시고는,
"원래 생각대로, 성필이하고 성희를 대표로 하도록 하자. 푸른달팽이, 그래도 되겠지?"라고 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예.. 제가 대표로 나가면 결국 예선에서 떨어질거에요. 이번에 제가 1등한건 우연이죠.. 그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야유를 보내고 앙탈에 가까운 항의성 소음을 내었지만,
그냥 그렇게, 대표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괜히 대표로 나갔다가 잘 못해서 망신당하는 것보다,
사실은 내가 대표의 자격이 있었는데 양보한거라고 생각하는게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정말 뿌듯하게 생각했다.
#2.
고등학교 1학년때의 일이다.
도 교육청 과학원에서 과학영재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각 학교에서 학생들을 추천받아 60명정도의 인원을 대상으로
두 학기 동안 매일 방과후 특강을 열었다.
담임선생님이 나도 참여해보지 않겠냐고 했을 때,
나보다 더 공부 잘하는 애들도 많은데 왜 나한테 그러시나 의아했지만,
결국 나는 그렇게 과학원 특강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강에 참여하는 동안, 나는 조용한 아이었다.
도 내에서 머리좋고 공부잘하는 아이들을 다 모아두었는데,
나는 그 꼴지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많이 위축되었었고 과정이 끝나는 수료일까지 그냥 그저 참여만 했다.
수료일에는 학생 대표들이 수료를 기념하기 위해서
롤링페이퍼를 돌려가며 그간 못다한 이야기들을 서로 글로 남기고
손수건을 하나씩 선물로 나눠주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마지막 수업 후 상태 그대로의 자리에 앉아
왼쪽에서 롤링페이퍼가 오면 페이퍼의 주인 이름을 보고,
그 사람에게 한 마디를 남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넘겨주는 식으로
한참 열심히 글을 남겼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퍼가 내 앞을 지나갈 때까지,
끝내 내 이름이 적힌 페이퍼는 내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내 페이퍼가 누락된 것이었다.
게다가 손수건 숫자가 사람 수하고 맞지 않는다고
학생 대표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도 마침 들렸다.
내 존재가 완벽하게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냥 조용히 있었다.
아무도 내가 빠진 줄 모르고 있다는건,
내 페이퍼는 있으나 마나 하다는 거니까,
뒤늦게 문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옆자리의 친구가 사실을 깨닫고 학생 대표들에게 귀뜸을 하는 바람에
나의 비존재는 금방 깨져버리게 되었고, 재빠른 수습과정을 통해 상황은 구제 되었다.
몇분 뒤 내 손에는 급조되어 학생 대표들만 몇마디 적은 페이퍼가 들려 있었다.
"누군지 잘 몰랐는데, 앞으로 잘 지내", "조용한 성격인듯...?", "1년동안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 등등..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칸을 채우려고 노력한 흔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학생 대표 중 하나가 양보해서 내게도 손수건이 하나 생겼다.
그냥, 내가 받아야 했었던 롤링페이퍼지만, 내가 받아야 했던 손수건이지만,
착오로 누락된 것을 내가 양해해서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 더 멋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뒤늦게 이상하게 수습되는 바람에 기분이 비참했다.
결과적으로는 멋도 없었고, 재미도 없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두 예가 모두 '나 예전에 공부 좀 했음..'이라는 식이 되어버려서 멋쩍지만..
이 밖에도 몇몇 기억을 들춰보면 나에게는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정당하게 받아야 할 처우가 있는데 누락되거나 박탈당하는 경우,
나는 문제를 제기하고 권리를 찾기 보다는
'명예롭게 양보하는' 방식의 대응을 선호하는 편이다.
한편으로는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를 적게 하도록 단련한 성격 때문에
선택에서 포기를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인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로는 잠재의식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자분지족의 성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내 자분지족은 현실에 만족하는 낙천적인 상태라고 하기 보다는
'내 주제에 이정도면 족하지...'하는 면이지만 말이다.
EBS 다큐멘터리 아이의 사생활 "도덕" 편을 보면,
10만원을 대가로 심리 테스트 면접에 참여하도록 연락한 뒤,
테스트 후 15만원을 건내줄때 피실험자들이 정직하게
처음 이야기보다 5만원이 많은 것을 언급하는지에 대한 실험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5만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15만원을 그대로 가져간다.
이것은 도덕성에 대한 실험이다.
하지만 거꾸로, 10만원을 준다고 했는데 5만원만 주는 실험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궁금하다.
나의 경우라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5만원만 받아올 것 같다.
'하긴 이런 간단한 실험에 10만원이나 줄리가 없지... 달라고 하는 것도 구차하고..'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건 도덕성과는 관련이 없는 듯 하고.. 무엇에 관한 실험이 될까?
이런 내 선택을 두고 주변사람들은 답답해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하는데,
말 뿐만이 아니라 나는 정말 괜찮다.
초등학교때 퀴즈대회 건은 아버지에게 '명예로운 양보'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을 정도였고
당시에 아버지는 상당히 분개해서 혼자 술을 많이 드셨다는 이야기는 최근에야 알았다.
고등학교때의 수료식 건도 누나에게 이야기했을때 확실히 나보다 더 기분상해 했던 것 같다.
요즘도 변함없이 이런 일들은 내게 종종 일어나는 편이다.
나는 변함없이 대체로 '명예롭게 양보하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며
지나고 난 뒤에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빼앗기는 것보다는 양보하는 것이 더 명예로우니까.
그리고, 아내에게는 이런 일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분명히 아내라면 나를 위해 분개해버릴테니.^^






덧글
susia 2009/12/08 10:01 # 삭제
당사자는 진짜 괜찮을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요... ㅎ
자기 기준에서는 말도 안되는 불합리한 일이니까.. ^^;
푸른달팽이 2009/12/08 11:02 #
sy 2009/12/08 14:34 # 삭제
푸른달팽이 2009/12/08 14:37 #
(이런 다이얼로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영어에만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