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상한 일중독

2000년,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몇년 전까지
나는 심각한 일중독자였다.

맡은 과업을 책임 완수하는 것이
내가 태어나서 살아있는 목표라고 생각하는 듯이 행동했고,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내일 더 많은 일들이 되돌아오는,
세상은 일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는 듯이 살았다.

긴급한 일이 사라지면 초조하고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일들이 있을거라고 믿으며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재빨리 해치워버리고는 했다.
여유가 생기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평소에 못했던 일들을 해치우려 들었고
결국에는 여유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왜이렇게 나한테만 일이 많은가에 대해 투덜거렸고
왜 다른사람들은 나처럼 많은 일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 투덜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일중독에서 해방되었다.

중독이라는것을 벗어나는 것이 뭔가 뚜렷한 계기가 있다면
어떻게 벗어났는지 설명하기가 참 수월하겠지만, 뚜렷한 계기는 없었다.

점진적으로, 점차적으로 나 자신에 돌아보는 것에 다시 능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 것 같다.
혹은, WLB(일과 삶의 균형)이론을 우연히 접하고,
'상자 안에 있는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도 우연한 기회에 진지하게 읽게 되고
프랭클린 플래너를 우연히 선물받고,
스티븐 코비 박사의 이론에 관심을 서서히 가지게 된 것이
그 계기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긴급한 일들보다 소중한 일들에 우선적으로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긴급한 일들이 긴급해지기 전에 모두 해결되는 경우가 누적되면서
결국엔 긴급한 일들에 할애해야 하는 시간보다
소중한 일들에 할애할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그래서, MBA 수강도 결심하게 되고, 아내와의 대화, 아이와 놀아주기,
직업에 관련된 책과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는 책읽기 등등
긴급하지 않더라도 내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시간을 많이 투입했다.
물론, 당연히 회사 업무도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전히 시간이 투입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중한것들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즐겁다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현재의 나는 일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계획에 집어넣고 있다.

- 월~금 매일 1시간 MBA 필수과목 학습
- 주 3회 블로그 글쓰기(1회당 약 30분 소요)
- '생각하는 프로그래밍' 하루 1챕터 탐독
-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하루 1챕터 탐독
- 월~금 매일 '이보영의 생활영어' (1회당 약 20분 소요)
- 화, 목 휴넷 공짜 강의 1개 학습(1회당 약 1시간 30분 소요)
- 금요일, 에듀프로 공짜 북 다이제스트 1개 탐독(1회당 약 20분 소요)
- 토, 일 '30대 리더십' 하루 1챕터 탐독
- 토, 일 MBA 선택과목 학습
- 시간날때마다 개인적으로 '인맥관리' 프로그램 개발 진행
- 월, 수, 금 헬스 트레이닝

쓰다 보니 기가 막힌다 -.-; 이러니 바빠 죽지...
게다가 회사 업무가 널널한 것도 아니고
현재 3~4개의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 그 중 1개는 내가 직접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아내와 매일 최소 15분은 집중해서 대화하고
아이와도 매일 최소 30분씩 놀아주고 있다.
그리고 요즘 하루 30분 정도씩 게임도 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이걸 모두 소화하고 있다는 것.

근데 좀 힘들다 -.-; 소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 잠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힘든 데도 보람차다는 것.
해야 하는 일로 느끼는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로 내가 계획한 일들이라서 말이다.
그래서 뭔가에라도 홀린듯이 나는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끼워넣을 시간이 없는지
항상 살피고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에 와서,
이것도 모종의 일중독이며,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일중독과는 양상이 사뭇 다른
'괴상한 일중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일 주간 계획을 세울 때는 이점을 반드시 고려해서
혹시 내가 진정 소중한 것들을 잊은 채로 계획을 잡은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내도록 계획을 잡아야 겠다.(-_-?)


...매주 일요일은 1시간을 할애하여 주간 계획을 잡는 날이다 ;-)

by 푸른달팽이 | 2008/09/21 00:31 | 푸른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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